문화, 스포츠 2012.11.26 00:07

잉여가 보는 시트콤(글 유경은)

 

올해 직장인이 휴가에 쓴다는 돈은 평균 53만원이라고 한다. 그러나 직장인 아닌 잉여가 휴가에 쓸 수 있는 돈은 집 전기세 정도 아닐까? 만날 쉬는 잉여지만, 그래도 노는 날은 챙겨야 하니까 올해도 피서는 미드로 하는 걸로.

 

세계적으로 불황이다 어떻다 하는데 내가 첫 번째로 크게 불황을 느끼는 곳은 미국 드라마 시장이다.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작가노조도 파업을 단행했었다. 배우노조도 파업을 지지했고 이는 잘 나가던 혹은 잘 나갈 예정이던 몇 시리즈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히어로즈(Heroes)라던가 24라던가. 대다수 시리즈는 방영을 중단했었다. 트랜스포머 2도 시나리오가 그 모양인 이유가 파업 때문이라는 후문도 있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단지 파업 때문에 시나리오가 엉망인 건 아닌 것 같지만)

 

미국 방송사들은 10화 이상은 애국가 시청률이라도 지켜봐주는 한국의 정이 넘치는 방송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시청률에서 싹 안보이면 그냥 자른다. 회생의 기미가 안 보이는 한때 잘 나갈 예정이었던 시리즈들을 싹둑싹둑 자른 후, 한동안 방송사는 꽤 큰 시리즈를 많이 기획했다. 많은 제작비가 투입되었지만 지금까지 지속되는 시리즈는 없다. 지금 딱 대작 미드 기억하는 것 말해보라. 얼음으로 시작하지 않나? (Rome)도 카멜롯(Camelot)도 프랜즈의 스타 메튜 페리의 드라마도 체면치레만 한 코트니 콕스의 드라마도 모두 다 완결 미드가 되어 버렸다.

 

, 이렇게 큰 건수들이 잘 안되면 가장 많이 하는 것이 뭘까? 가수들이 그럭저럭인 음반 내놓고 다음에 내놓는 음반은? 리메이크. 최근까지 예전 리메이크들이 야금야금 등장했었다. '하와이파이브오(Hawaii five O)'를 제외하고는 걔들도 영 힘을 못 쓰고 잘렸다. 심지어 원더걸... 아니. 원더우먼은 시청자에게 파일럿을 미리 보여주고 방영도 못한 채로 종료. 대체 어땠길래 그랬나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도래했다. 시트콤의 천하가

한국에서는 하이킥 시리즈나 최근 '선녀가 필요해'로 근근히 명맥을 잇고 있는 시트콤. 무슨 어느 방송국이 시트콤을 방영하면 다른 방송사는 그 시트콤을 지켜봐주는 따스한 전통이라도 있는지 한국에서는 별로 손을 안대는 장르지만 미국은 다르다. 시트콤은 늘 그 배경이 그 배경이기 때문에 세트가 많이 필요 없고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개그 콘서트가 그렇듯 한 유머가 먹히면 그걸 꽤 길게 써먹을 수도 있다. 시간도 짧다. 20분에서 길면 30. 제대로만 터지면 인기도 길게 가고 망해도 들인 돈이 적어 손해 볼 것 없다. 우리나라만 고기집 옆에 고기집이 생기는 아름다운 문화를 가진 것이 아니다. '빅뱅 이론(big bang theory)''오피스(the office)', '모던 패밀리(modern family)'의 성공 이후 미국은 시트콤을 미친 듯이 찍어 내기 시작했다. 망한 것이 뜬 것보다 훨씬 많지만 적당히 비교적 신작들 중에서 추천작들을 골라보았다. 물론 내 취향으로.

 





mike and molly

마이크와 몰리는 과체중모임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시작한 커플이다. 시트콤을 보다보면 마이크와 몰리만 빼고 다들 나사 하나씩이 빠져있다. 식습관을 조절 못해서 운동을 안 해서 살이 쪘을 거라 모두가 여기고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의 연애는 따뜻하고 정감 있다. 1시즌 당시 신작답지 않게 시청률이 높았다.

 




veep
veep은 부통령을 가리키는 말이다. 미국의 부통령직은 만일의 상황, 그러니까 대통령에게 응급 상황이 닥쳤을 시 직무를 대신하는 일을 맡기 때문에 대통령이 강녕하신 경우는 딱히 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평소 잉여인 셈이다. 상원의원과의 기싸움에서 눌리기도 부지기수.
영국 시트콤 작가의 바삭한 대본은 진지한 배우들과 함께 잘 살아난다. 아. 그리고 방송사가 HBO다. 소프라노스, 섹스 앤 더 시티, 얼음과 불의 노래 등등의 HBO.




 

girls

이 드라마도 방송사가 HBO. 그리고 잉여라면 주목해야 할 드라마이기도 하다. 발랄한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레나 던햄이 제작과 각본과 배역까지 참여했다. 아직 girl로 분류되도 괜찮을 그녀는 내가 이제껏 본 중에 가장 리얼한 20대 드라마를 만들었다. 20대 섹스 앤 더 시티라고들 하지만 그런 블링블링하고 패뷸러스하고 마놀로 블라닉 신는 여자들은 없다. 명품은 무슨. 아파트 월세 고민, 직장 고민, 연애 고민, 공허한 나를 채우느라 눈 코 뜰 새 없는데. 남자들 취향은 아닐 듯싶고 시트콤이라기엔 우울한 부분이 있지만 가는 핀 같은 날카로움이 있다.

 




awkward

사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가 고등학교 때 두려워하던 모든 것이다. 달라진 것은 스케일 뿐. 우리는 사랑을 얻을까 잃을까 비밀이 밝혀질까 저 사람에게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저 사람이 싫어 죽겠는데 어떻게 내 시야에서 없애나, 타이밍이란 것은 언제 오나.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이 순간에도 머리를 싸쥔다. 어쿼드는 학교 내에서 잘나가는 학생도 왕따인 학생도 모두가 고민이 있는 학교의 모습을 다룸으로써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음악 방송 MTV가 꾸준히 청소년 드라마를 손댄(많이 망했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내공으로 만든 드라마다.

 




2 broke girls

토르를 봤다면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탈리 포트만의 어눌하고 좀 모르고 뭘 좀 아는 조교 역할. 떠올랐나? 크리스 햄스워스 옷 갈아입는 장면에서 좋아하던 그 조교. 어쨌든 그 역할의 캣 데닝스가 두 파산녀 중 원래부터 파산이었던 까칠한 맥스로. 베스 비어스라고 치면 아직 베스비어스 화산 폭발밖에 뜨지 않는 신인인 베스 비어스가 뉴욕에서 가장 부자였다가 아버지 횡령 건으로 신탁이 지급되지 않아 식당일을 하게 된 무한 긍정 공주님 캐롤라인으로 나온다. 이 시트콤은 맥스의 음담패설 섞인 독설이 매력 포인트인데 시즌 후반부에는 자꾸 따스한 맥스가 강조되면서 살짝 힘을 잃기도 한다. 하지만 굳이 굳이 이 중 뭐 하나만 보겠다면 주저 없이 2 broke girls! 파일럿부터 5화까지는 매 편마다 세 번은 넘게 봤다

   

(episodesMelissa and Joey, community, the middles, How I met your mother, Louie 이미 끝난 entourage 등등 주옥같은 시트콤들이 많긴 하지만 순전히 최신성과 취향으로 뽑은 시트콤 들이다. 까기 없기.) 시트콤은 필연적으로 문화적 색채가 짙고 말놀이가 많아서 영어 공부에 많은 도움이 된다지만 뭐 시트콤을 굳이 영어 공부하려고 보겠나. 다 핑계일 뿐. 영어 공부는 BBC와 상의하시고요, 드라마는 재미로 보는 거에요. 미드는 몰아보는 재미인데 심지어 20분씩이니 시간도 술술 가고 체력적으로도 부담 없고 좋지 뭐. 일단 아이스크림 파인트로 한 통 챙기고 책상 위에 다리 얹고 시작하자. 모두 가을에 만나요.





※ 월간잉여 8월호에 실린 글을 겨울에 업데이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