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터뷰 2013.03.07 21:46

"다 해봤노라" 舊 에반게리온 덕후 박현복

쓸모의 관점에서 잉여짓과 덕질은 통하는 구석이 있다. 둘 다 쓸모없기는 마찬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대개의 덕질은 대개의 잉여짓보다 돈이 들 때가 많다는 거?

20126, 가이낙스는 <에반게리온 Q>의 일본 개봉을 앞두고 스탬프 랠리행사를 벌일 거라 공표한다. 4개국에 흩어져있는 에반게리온 스탬프를 지정된 기간 안에 모으는 것이 이벤트의 주요 내용이였다. 첫 스탬프 일정인 프랑스 일정까지 불과 보름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가뜩이나 비싼 항공권, 급하게 사면 더 비싸다. 스탬프 랠리에 참가하는 덕후의 지갑은 항공권 구입과 체재비로 너덜너덜해질 것이 분명했다.

가이낙스의 공지를 본 박현복 씨와 그의 덕질 동료 종호 씨는 가이낙스를 욕하기 시작했다. “누가 사골게리온 아니랄까봐 엄청 우려먹네” “그러게. 누굴 호구로 아나.” 한참 욕하다 정적이 찾아왔다. “그런데 이거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해?”

이제까지의 덕질을 집대성하며 하얗게 불태우기 위해 스탬프 랠리에 참여했고, 그 여정을 다큐멘터리 영화 <에바로드>로 만든 박현복 씨를 만났다. (진행, 정리 잉집장)





(중략)

: 왜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을 벌였나? 엄청난 상품이라도 걸려있었나?

: 상품을 준다는 말은 있었지만, 무슨 상품일 거라고 미리 공표하지는 않았다.

: 그런데도 행사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이벤트를 진행하는 가이낙스에 대한 비판은 없었나?

: 비판하면서도 했다. 스스로도 호구라고 자각하고 있다.(웃음) 사실 덕후짓이 비판받는 지점도 소비지향적이라는 데 있다. 현재 자본주의가 노동착취적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식하고, 이를 비판하면서도 계속 소비하며 자본주의에 종속됐던 것 같다. 소비지향적인 덕질은 그만둬야겠다고 다짐했다. 피규어도 처분하고 앞으로 나오는 에반게리온도 안 보고(웃음) 그런데 머리로는 그만둬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이 안 따라줬다. 그만두기 전에 이런 짓을 해야 그만둘 수 있을 것 같았다. 또한 소년기부터 해왔던 덕질에 대한 총결산을 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고픈 욕구도 있었다.

: 에반게리온에는 어떤 마성이 있나? 그렇게까지 좋아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 가이낙스는 덕후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는 회사다. 에반게리온도 덕후들이 좋아할만한 요소가 많도록 만들어졌다. 안노(<에반게리온> 감독)가 뭘 좀 안다. 기본적으로 덕후들은 소년물’, ‘메카닉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에반게리온도 소년물이자 메카닉물이다. ‘츤데레인 아스카, ‘쿨데레인 레이 등 캐릭터들의 성격도 캐릭터 덕후들이 좋아하는 성격이다. 신극장판에서 추가된 캐릭터인 마리는 안경착용, 큰 가슴, 큰 키 등 모에요소가 많다. 나 같은 경우는 설정덕후인데 장면하나하나를 돌아보며 기독교 코드, 동양철학 코드를 읽는다. 예컨대 AT필드(Absolute Terror Field)라는 게 있다. 로봇을 보호하는 방어벽인데 마음의 벽을 상징하는 것이다. 동양철학적으로 보면 피아의 구분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벽이 지나치면 공격이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에게 배타적인 것도 AT필드가 가동된 것이라고 본다. 이는 소수자에게 상처를 입힌다. 마음을 열어야 한다.

: 좋은 말씀 잘 들었다. 이제 행사도 마감됐는데, 상품이 무엇인지 발표 됐나?

: 그렇다. 프랑스, 미국, 일본, 중국 중 한 국가의 왕복항공권과 숙박권, 혹은 원화가가 직접 그린 단 하나뿐인 캐릭터 그림 중 택하라고 했다.

: 치사하다! 둘 다 주면 안 되나?

: 어차피 상품을 바라고 한 게 아니라 상관없다.

(웃음) 나는 캐릭터 그림을 택했는데, 그래도 원화가가 직접 그린 '단 하나뿐인 캐릭터 그림'은 나름 의미가 있다. 덕후는 한정템, 희귀템을 좋아하는 법이다.

: 무슨 캐릭터를 그려달라고 했나?

: 마리를 그려달라고 했다.




에반게리온:파(破)(2009) 포스터
(왼쪽으로부터 마리, 아스카, 레이)




: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마리인가 보다.

: 그건 아니다. 아까 말했듯이 마리는 제작진에서 작정하고 덕후들이 좋아하는 코드를 추가해 만든 캐릭터다. 이런 이벤트에 참여해 이미 호구가 됐으니, 아예 호구를 위한 캐릭터 그림을 훈장으로 수여받는 게 이 여정을 끝맺기 적절해 보였다. 아마 원화가도 마리를 그려달라고 할 줄은 예상치 못했을 거다. 어쩌면 아스카랑 레이를 미리 그려놓고 물어봤는데, 내가 마리를 그려달라고 하니까 투덜대며 새로 그렸을 수도 있겠다. (웃음)




※박현복 씨와의 인터뷰 전문은 월간잉여 3⦁4월호(제12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