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013.03.08 20:50

올림픽을 보다가 下 (황진규)

 

메기 이론을 아는가? 그것은 한 개인이나 기업이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적절한 위협요인과 자극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이것은 과거 냉장기술이 없었을 때 유럽의 어부들이 북해 연안에서 잡은 청어를 먼 배송지까지 운송할 때 수조에 청어의 천적인 메기를 함께 넣어 운반함으로써 싱싱하게 산 채로 운반할 수 있었다는 일화에서 유래됐다. 청어가 메기에게 잡아 먹히지 않으려고 도망 다니면서 청어가 더욱 건강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메기이론은 영국의 경제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아널드 토인비 박사가 즐겨 사용하였고, 국내에서는 1993년 삼성의 이건희 회장이 경영혁신을 내세우며 인용하기도 하면서 경제, 경영 및 다양한 분야에서 자주 인용되는 이론이다. 이 메기 이론의 핵심은 기업이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긴장과 자극, 위기의식과 같은 적절한 자극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염장청어 먹는 법




그럼 메기 이론이 정말 맞는 걸까? 최근 <사이언스>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이것은 메뚜기 연구에 관한 것이다. 이 연구는 포식자가 먹이동물의 화학조성을 바꾸어 놓으며, 결국 토양 생태계까지 변화시킨다는 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연구진은 메뚜기 사육장 두 곳 가운데 하나에 천적인 거미를 집어넣었다. 거미의 입을 접착제로 붙여 메뚜기는 잡아먹히지는 않지만 공포에 사로잡히도록 했다. 공포는 메뚜기에게 스트레스 반응을 일으켜 몸속의 에너지 소비가 증가하고 결과적으로 공포를 겪지 않은 메뚜기에 비해 영양물질인 질소의 체내 함량이 줄어들었다. 연구진은 스트레스에 시달린 메뚜기와 정상 메뚜기의 주검이 분해해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했다. 분해 기간은 약 40일로 같았지만 스트레스 메뚜기의 주검에 질소 함량이 낮아 토양 미생물 성장이 억제되고 결국 토양의 영양순환이 느려지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실험이 시사하는 바가 뭔가?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메뚜기는 그 자신의 화학 조성까지 변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의 본질까지 훼손시킨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주검이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서도 토양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사회 공동체 내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LED 의상 입은 메뚜기 월드 대통령.jpg





메기이론에서 청어는 단기적으로는 행동이 빨라지고 활동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성과 행복의 관점에서 보면 어떠한가? 극심한 경쟁에 의한 스트레스에 의해 메뚜기의 화학조성이 바뀌듯이, 청어는 본성을 잃고 행복 또한 요원해 질 수 있다.


메기이론은 약자에 대한 강자 혹은 기득권의 억압을 합리화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미화하는 치명적 약점을 지닌다.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 사회가 열심 증후군에 시달려 진정 무엇이 위해 열심히 하는가를 잊은 채 열심히 사는 것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첫 번째 이유는 사회가 조장하는 열심 증후군은 앞서 말한 간교한 기득권의 논리에 동원될 여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정부에서 DTI규제를 풀어 젊은 사람들에게 집을 구매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대출 규제를 완화해 줄테니 열심히 일해서 집을 사라는 이야기다. 향후에 집값이 오를지 떨어질지 같은 이야기는 하지 말자.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본질이 아니니까. 하지만 규제를 완화해서 대출을 받아 집을 사는 순간부터 나는 오직 집을 사기 위해서만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집을 가진다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소중한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가지기 위해서임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출을 받고 나면 그 중압감에 야근을 하고, 또 주말에도 일을 하고, 그로 인해 가족들과 이야기할 시간조차 없어지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대출을 받고, 열심히 노력을 하고, 일을 한다 말인가.


우리는 현명해져야 한다. 사회가 조장하는 열심 증후군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는 이유는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을 위한 것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열심히 하라고 하는 것은 들을 필요 없다. 오직 내가 선택하고 행동하면 될 일이다.


내가 사회가 열심 증후군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는 그 두 번째는 우리 모두가 피나는 노력을 하며 살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아니 적확하게 말하면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하며 살지 말지는 개인이 결정하면 될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력하며 무언가를 이루어 가며 사는 것이 좋다. 그것이 내가 살아있고, 내 삶에 의미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친구 L과 나는 방송편집 일 때문에 일주일 한번은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L은 나의 방송 편집을 맡아서 해주고 있는 친구다) 아직은 무명인 L을 만날 때 마다 나는 내심 그가 자신의 분야에서 치열하게 노력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마뜩찮게 생각해왔다.

 



: 요즘 음악 작업은 잘 되어가?

L : 뭐 그냥 그렇지,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고. 안 되면 친구들하고 술 한 잔하고 그러지, .

: 좀 만 더 열심히 하면 넌 재능도 있고 하니까 사람들이 알아 줄 텐데.

L : 뭘 그렇게 하냐? 좋아서 하는 건데, 즐기면 되는 거지 뭐.

: (언성을 좀 높이며) 아니, 좋아하는 일이니까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거잖아.

L : 난 가끔 너랑 이야기하면 숨이 막혀, 뭐든 그렇게 치열하게 해야 해? 그냥 지금 하는 거 좀 즐기면서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거야? 나는 막 새벽에 일어나서 작업하고 또 밤늦게 까지 작업하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돈이 없으면 없는 데로 살면 되는 거고, 사람들이 때가 되면 알아주겠지,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할 수 없고. 지금 내가 하는 게 좋으니까 그걸로 된 거잖아.

 




우리의 짧은 언쟁은 나의 완패로 돌아갔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래. 꼭 치열하게 살 필요는 없잖아. 돈 못 벌면 없는 대로 살면 되는 거고, 대신 자기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을 때 하고, 여행가고 싶을 때 여행가고 그러면 그것으로도 좋은 거 아닌가하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떤 일을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노력하는 것은 필수가 아니다. 그것은 선택이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노력보다 욕망이다. 내가 무엇에 꼴리는지, 언제 설레고 행복한지를 아는 것이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당신이 꼴리는 일에 최고가 한 번 되어 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은, 치열하게 해보는 거고, 그게 아니라 욕망하는 그 일을 그냥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유유자적형 인간이라면 그냥 그렇게 욕망을 즐기며 설렁설렁 살아도 관계없다는 것이다. 후자의 선택이라고 해도 그것 자체로 자신의 삶에 충분한 의미가 있을 테니 말이다. 다만 아쉽게도 나는 욕심이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기에 이렇게 새벽에 글을 쓰고 있는 거고.

 

정말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욕망하지도 않은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내가 만나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에 설레는지도 모른 채, 30, 40년 혹은 50년을 넘게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중에서도 정말 안타까운 사람은 자신이 꼴리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치열하고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저 내일은 무엇인가 행복이 있을 것이라 믿으면서 오늘의 고통을 묵묵히 참아 낸 사람들이다. 그 중 운 좋은 사람은 정년퇴직이라는 금메달을 수여 받았을 것이며, 운이 좀 안 좋은 사람은 명예퇴직이라는 은메달을 땄을 것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 못한 채 그저 치열하고 열심히 만 살면서 따낸 메달은 허무와 냉소만을 남기게 될 것이라는 데, 삼백 원 건다.

 

치열하게 노력할지 그렇지 않을지는 전적으로 자신 몫이며,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것은 없다. ,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재미있어하는지, 언제 행복한지, 어떤 사람과 함께 할 때 설레는지 하는 것들은 반드시 알아내어야 한다. 그런 원초적인 개인의 욕망을 무시하고는 그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으며, 행복한 삶도 없기 때문이며 또한 인간은 아무리 잘난 척해봐야 결국은 욕망을 찾아 행복을 좇을 수 밖에 없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우리나라가 개인의 노력이나 희생보다는 개인의 다양한 욕망을 인정해주고 격려해줄 수 있는 건강한 사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 월간잉여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