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13.04.06 23:30

우리는 모두 잉여가 됩니다 (박잉여)

잉집장 주: 1월호 주제는 '예언'이었습니다. 다음은 취업준비생 박잉여님이 남긴 예언입니다.


해리포터: 불사조 기사단에서의 볼드모트




지금부터 하는 얘긴 대기업과 관련된 이야기다. 우리나라 수출액의 66%는 대기업이 차지한다. GDP70% 이상을 재벌기업이 떠받친다. 대기업을 빼고선 우리나라 경제를 논할 수 없고, 한국의 대졸 젊은이들에겐 응당 대기업에 들어가야 인생의 보증수표를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그러나 대기업 들어간다고 잉여와 영영 멀어지는 건 아니다.

 


Part.1 관리직, 영업직

필자는 유독 대기업과 관련이 많다. 아버지는 불황과 상관없이 해외에서 날개 돋친 듯 물건이 팔린다는 모 대기업의 영업부에서 일하신다. 그런데도 경기 나빠진다는 뉴스만 보면 필자는 가슴이 철렁 한다. 주변 친구 5명 중 3명은 대기업에 취업했다. 하나뿐인 동생마저 지금 박사과정을 밟고 있긴 한데 그것 역시 대기업 연구직에 취업하기 위해서다. 주변의 누굴 만나든 화제는 자연히 기업, 경기, 주식, 퇴직뭐 그런 것들이다.


얼마 전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간만에 온 가족이 모였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정년 이야기가 나왔다. 보통 대기업의 관리직 정년은 현재 기준으로 53세 정도다. 하지만 아버지는 영업직이라서 그쪽보단 좀 길었다. 노조에 가입돼 있어 실제 은퇴연령은 60세 정도. 요즘 대선후보들이 내놓은 정년 연장 방안은 대체로 60~65세까지다.

내게는 이 이야기가 꽤 심각하게 다가왔다. 아버지는 오히려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대기업에 다니는 내 친구들은 대부분 관리직이다. 끝까지 다녀도 일찍 퇴직할 게 뻔했다. , 임금피크제를 하는 곳도 있으니 길면 5~10년 더 버티겠군. 아무튼 문과생으로서 취업난을 딛고 대기업에 취직한다 해도 인생이 보장되는 게 아닌 것은 확실했다.

 





영화 베사메무쵸 (2001)

영화의 주인공 철수(전광렬 분)가  느닷없이 직장을 잃게 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보증서준 친구의 빚을 대신 갚아야 할 지경에 놓이며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




Part.2 연구직

문득 옆자리에 앉아 있는 동생을 보니, 연구직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내 동생은 내추럴-본 공대생(?)으로, 학부를 조기졸업하고 20대 중반에 석박사 통합과정을 밟아 30세가 되기 전에 박사학위를 받을 예정인, 군대까지 면제받은 공대생의 모범 케이스였다. 남들이 보면 멋져 보이지만, 사실 나름 인고할 게 많은 인생이다. 서른 살이 가까울 때까지 연구실에 처박혀 있어야 한다니. 동생이 이런 삶을 결심한 것도, 결국은 보장된 자격증(학위) 갖고 안정된 대기업 연구직으로 취업하기 위해서였다. (교수 욕심 따위 없다. 오로지 기업이 목표다.)


그렇다면 박사학위까지 따서 들어간 그 연구직은 일반 관리직, 영업직과는 다를까. 막연한 기대감을 갖고 동생에게 물어봤다.



박잉여: 동생아, 대기업 연구직은 그래도 정년이 길지?

동생: ㄴㄴ 더 짧음. 박사는 늦게 취업하니까 좀 더 늦게 퇴직함. 50~51세 정도?

박잉여: 말도 안 돼. 관리직보다 더 짧잖아. 지식노동은 더 오래 일해야 좋은 거 아냐??

동생: 나도 궁금함. 왜 연구직 정년이 더 짧은지.

박잉여: 그럼 연구직들은 은퇴하고 뭐 한대? 연구실 형들은 뭐 한다니?

동생: 치킨집

박잉여: ㅋㅋ치킨집 이름 뭐로 할 건데.

동생: ‘닭터’. (doctor의 한글 발음과 같음)

박잉여: …….

동생: 이번에 포닥(post-doctor의 줄임말)으로 미국 갔다 돌아오는 선배도 하나 차릴 거래. 닭집 이름은 ‘포닭’ 

박잉여: ㅋㅋ아니 그럴 거면 박사는 왜 하는 거여?

동생: 몰라ㅋㅋ 남들도 하니까?

박잉여: …….

동생: …….

 



교수가 되려면 적어도 40대 중반에는 연구직을 박차고 나갈 건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박사마저 넘쳐나는 시대, 교수 자리 구하기도 하늘의 별따기다. 그래서 그 취업 잘된다는 공대의 박사 연구생마저 박사 다 부질없다생각 하고 있는 것이다. 순수 공학 공부에 몰두해 온 그들이 정년연장을 정부에 요구할 의지를 갖긴 쉽지 않고. 그저 퇴직 후의 인생을 뭘 하며 보낼지 궁리하고 있는 거다.


그래도 연구직 출신들은 아이디어가 많아서 퇴직 후에 창업으로 대박 내는 경우도 있어. 하지만 기술도 학위도 없는 일반 관리직 출신은 아무것도.” 내 동생은 이렇게 말하며 스크린골프의 창시자의 예를 들었다. O자동차 출신의 연구직 퇴직자였던 그는 스크린골프로 수백억을 벌었다고 한다.


학위나 기술마저 없으면 퇴직 후 먹고살 방도가 없기 십상. 박사는커녕 인문학+사회과학 학사학위 달랑 하나인, 게다가 미취업 백수잉여인 나는? 지금부터 열심히 가상의 연봉으로 재테크 시뮬레이션을 해야 한다. 재테크의 중요성이 이토록 와 닿는 건 처음이다.


억울하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메일 하나씩 보내자. 평균 수명이 80세를 넘어가니 정년 따위 없애버리자고. 물론, 그 청탁을 들어줄 경우 우리 청년세대의 대기업 취업길이 더욱 바늘구멍이 된다는 것쯤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난 연금 받으면서 월간잉여에 계속 기고해 자기만족하며 살 계획이긴 한데.










※ 월간잉여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