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2013.09.17 20:24

밀양의 싸움 (이계삼)







아름다운 산이다. 밀양시 부북면 평밭마을에서 바라본 화악산 자락이다. 산을 바라보노라면 마음에 옅은 평화가 인다. 이 산자락으로 765000볼트 고압 송전탑이 지나가게 된다. 24시간 내내 끼익끼익하는 기계음이 울리고, 신고리핵발전소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전류를 실어나른다. 이 산 아래에는 '위양'이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고, 이 산 옆으로 속세를 떠나 병을 고치고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노인들이 사는 '평밭'이라는 마을이 있다. 위양과 평밭을 가로지르는 40층 높이의 초고압 송전탑이 냉방병을 걱정해야 하는 한여름 에어컨과 반팔 티셔츠를 입고 다니게 하는 한겨울 히터와 밤새 휘황한 네온사인과 번쩍이는 도시의 육체를 지탱할 혈액을 실어나른다.






주민들이 막아서자 결국 놓고 간 128번 송전탑 공사 현장의 굴삭기다. 개발과 파괴를 상징하는 하나의 기계, 저 굴삭기에 들어가는 기름 마지막 한 방울이 떨어지는 날, 이 파괴의 행렬이 멈추어질 것이다. 헬기가 산 정상으로 이 굴삭기를 떨어뜨려준다. 적진 깊숙이 침투하는 특전요원처럼 지상으로 내려온 굴삭기는 산을 파헤치고, 지하 15미터 암반층까지 거대한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거기에 쇳덩이로 조립된 둥근 거푸집을 쑤셔박고 그 안으로 헬기가 콘크리트를 들이붓는다. 그 다릿발 위로 거대한 쇠기둥들을 조립해서 40층 높이의 탑을 쌓고, 거기 다시 헬기가 초고압전선을 걸어 이어 붙인다.

 

그러나, 우라늄이 모두 없어질 60년 뒤, 이 구조물들은 어떻게 될까. 다시 헬기가 쇠기둥들을 해체하고, 다시 굴삭기를 떨어뜨려 15m 지하까지 교각들을 부숴 해체하고, 콘크리트더미를 치워 나르고, 그 자리에 다시 나무를 심어 원래 자리로 되돌려줄까. 송전탑 건설 공사 계획 속에 60년 뒤의 해체 계획은 들어있을까. 아닐 것 같다. 저 굴삭기처럼 계획도 성찰도 없는 '순간을 살아가는' 단세포적 무지막지함 말고 다른 것은 없는 것 같다.











나의 2012년은 이 사진으로부터 시작한다. 116, 산외면 보라마을회관 앞 제방에서 휘발유를 끼얹고 제 몸에 불을 붙인 일흔네 살의 할아버지. 분신이라니, 그것도 74세의 노인이. 이 참혹한 사건이 바로 이곳, 내가 사는 곳에서 벌어졌다는 엄중함이 나를 이곳으로 불렀다. 어르신은 당신의 몸을 불사르면서 나와 같은 청년들을 이 싸움으로 초대한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 어르신의 주검에는 많은 것들이 뒤엉켜있다. 한평생 경찰서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어른들이 수없이 사진을 찍히고 고소와 고발을 당하고 아들뻘 수사관들에게 취조당해야 하는 치욕, 일생토록 지켜온 농토 주인의 지위에서 하루아침에 내쫓겨 '채무인'으로 등재된 법원 계고장을 받아야 하는 황당함, 손자뻘 용역들과 맞서야 하는 나날, 그들에게 들었던 숱한 욕설, 그러나 세상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외로움까지. 이 사진을 보라. 여기에 이 시대가 드러누워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밀양은 보수적인 곳이다. 60~80대 노인들이 도로를 점거하고 가두 행진을 했다. 저들의 손에 들린 '핵발전소 반대', '살인마 한전', '이치우 열사'라는 구호는 어쩌면 해방 이후 밀양이라는 극보수의 도시에서는 처음 볼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그 보수성과 낯설음이 지금도 우리의 투쟁을 더욱 전면적으로 나아가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음을 느낀다. 이길 수 있을까, 국가권력과 거대한 공기업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겠나, 하는 회의가 이 싸움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보수성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삶의 오래된 관성, 국가의 위력과 일방독주를 숨죽여 지켜보아야 했던 우리의 오랜 역사가 각인시킨 패배감이 함께 엎드려 있다.


















이 싸움의 중요한 분기점이 된 사건으로 317~18일에 걸쳐 있었던 탈핵희망버스 행사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37, 유족의 일부가 장례에 합의하게 되어 장례가 치러졌다. 주민들끼리의 충돌을 우려한 수십명 경찰 병력이 여남은 명의 가족 행렬을 뒤따르는 기이한 모습이었다. '경찰장()'이라고 누군가가 쓸쓸하게 말했다. 이렇게 이치우 어르신을 보내면서 눈물이 삼켜졌다. 제대로 애도하지도 못한 채, 이 죽음의 의미를 한번 새겨보지도 못한 채, 볼썽사나운 다툼만을 남기고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는 연대가 절실했다. 환경운동 진영의 주요한 단체들로부터 '탈핵희망버스'는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성공할지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저 우리는 연대해야 했으므로. 그렇게 해서 준비된 행사였다. 다행히 많은 사람들이 왔고, 그들을 대접하기 위해 우리 지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다.

 

감동적인 12일이었다. 영남루 앞 강변의 이치우 어르신 추모문화제에서 울고 웃으며, 마지막에 덩실덩실 어울리며 술과 음식을 나누던 밤을 잊을 수 없다. 송전탑 벌목지에 나무를 심고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증언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던 시간을 또한 잊을 수 없다. 우리가 온 밀양 시내를 다니며 붙였던 전단지, 포스터, 그리고 그날 행사를 위해 우리가 부쳤던 전과 끓어낸 어묵탕, 커피와 대추차, 희망술독이라는 막걸리단지, 모두 우리 너른마당 식구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참가자는 지금까지 다녀본 그 어떤 행사, 집회보다 감동적이었고, 잘 준비된 행사였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날 참여한 사람들은 정말로 연대의 전령사가 되어 다음 또 그 다음 밀양을 방문했다. 자신이 소속된 단체의 회원들, 가까운 친구들을 데리고서. 그렇게 해서 크고 작은 수많은 후속 행사들이 이어졌고 밀양은 조금씩 알려지게 되었다.










 

67, 한전의 공사재개를 규탄하는 집회에서 피켓을 들고 있는 여자분은 상동면의 은희 씨다. 나는 종인이엄마라고 부른다. 내가 가르친 종인이의 어머니다. 의협심이 남다르고, 다른 아이들은 마다하는 입바른 소리를 할 줄 아는 종인이를 남달리 보았는데, 이 싸움에서 그 부모님을 알게 되었고, 종인이의 의협심과 바른 성정이 아이의 부모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부산에서 남부럽지 않게 살다가 밀양으로 전원생활을 위해 들어왔다가 그들이 사는 여수마을 바로 코앞으로 송전탑이 지나가게 되어 이 싸움에 함께하게 되었다.

 

의협심 하나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발을 너무 깊이 담그게 되어 빠져나갈 수도 없다고 푸념하신다. 밀양시청 앞에서 열흘 동안 단식을 하기도 했고, 신고리핵발전소 5~6호기 주민설명공청회에서는 막아서는 용역들과 대치하다 대리석 바닥에 머리를 크게 부딪쳐 쓰러지고 말았다.

 

현장에서 119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는 시간은 황망했다. 은희 씨의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곁에 있던 내 가슴이 얼마나 졸아들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은희 씨는 깨어나는 순간, 눈물부터 흘렸다. 소리 없이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리고, 그 다음날 오전까지 하루 내내 말씀이 없으셨다.

 

그날 공권력이 보여준 말할 수 없이 비겁한 태도, 공청회장 진입을 막아서던 지역 청년회를 보호하고, 그들의 완력행사에 대해 항의하는 우리들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묵인하던 그들의 행태, 청년들의 폭행에 항의하자 '우리는 모르는 사람'이라며 발뺌하던 한수원 관계자들, 결국 온갖 욕설과 폭력 속에서 진입을 저지당했다가 끝내 쓰러지고 말았을 때, 그때의 육체적 고통(온몸이 멍투성이였다)과 실신해서 깨어났을 때부터 다가온 인간적인 모멸감과 서글픔이 은희 씨의 묵언과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에 담겨 있었다.

 






이런 글을 읽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낄 정치인, 관료들이 있을까. '이 나라가 이렇게 고통을 줍니까.' 이 말에 담긴 절망과 슬픔을 저들은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비뚤비뚤 흔들리는 글씨체로 쓰인 저 말, '오직 이대로 살다가 죽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절규를 하느님의 말씀보다 무서운 '사람의 말'로 알아들을 귀가 있을까.

 

나는 처음 이 탄원서를 보았을 때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농민의 마음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반 일리치라는 사상가는 전 세계 토착 민중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집약하는 하나의 표현으로 '지금 이대로'를 들었다. 이것은 근대적 진보의 문명관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장과 진보의 근대적 신화는 '지금 이대로 가면 우리는 뒤처지고 죽는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는 언술로써 세상 천지를 지금껏 엉망진창으로 개벽해왔다.

 

그러나, 저 가난한 할아버지 할머니, 겨우 밭에서 허리 굽혀 푸성귀를 가꿀 정도의 육체력만 남은 저 어르신들이 바라는 것은 정말로 '지금 이대로' 살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욕심 없다'는 저 말은 또 얼마나 묵직하게 들리는가. 송전탑이 들어서는 것이 '조상님에게 죄가 되는 것 같아 죽고 싶다'는 이 말을 저들은 이해할 수 있을까. 조상님이라니. 조상이 밥먹여주나, 웬 조상타령? 우리의 삶이 이 땅을 매개로 저 조상들, 조상의 조상들로부터 우리의 자식, 자식의 자식으로 이어진다는 연속성의 감각은 얼마나 황폐해져버린 것일까.

 

물려받은 땅을 더럽히게 되어 조상님에게 죄가 되어 죽고 싶다는 노파의 이야기를 알아들을 귀는 이 시대에는 없다. 이 허욕으로 가득 찬, 온 천지가 사기 도박판으로 변해버린 나라에서는 말이다.

 







이금자 할머니. 여든한 살의 소녀 같은 할머니다. 어느 자리든 150cm가 될까 말까 한 자그마한 체구, 30kg을 겨우 넘을 것 같은 가녀린 몸으로 이 싸움의 모든 자리에 함께한다. 강원도 삼척, 경북 영덕으로 함께했던 탈핵희망버스행사 12, 국회 증언대회에서는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오기가 난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되면 어쩌란 말이냐, 나도 죽으라는 말이냐'고 절규하면서 그 자리에 함께한 문재인 민주당 예비후보를 울리신 분이다.

 

국회에서 내려오는 버스 안에서 내 옆자리에 앉아 내 손을 쥐며,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어머니 아버지만 아니라 그 선대부터 기도를 많이 해서 그런 거요, 그래서 그 자식이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 거요' 하며 나를 위로해주셨던 분이다.

 

여든한 살 이금자 할머니는 잔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몸을 운신조차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이곳저곳 요양지를 보러 다니다 화악산 자락 평밭마을을 알게 되었다. 수려한 산세와 맑은 시냇물, 속세와 단절된 해발 300미터의 작은 마을에 반한 할머니는 거처를 평밭마을로 옮겼고, 기적처럼 몸이 나아 행복한 여생을 즐기고 있었다.

 

그 마을 코앞으로 송전탑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황혼도, 안개 낀 새벽도, 구름에 실려가는 한낮의 산자락도 이제 40층 높이의 송전탑을 끼고 바라보게 되었다. 어떻게 되찾은 삶의 평화인데, 다시 빼앗겨야 한다는 말인가. 지난 1년간 마을 노인들과 함께 인부들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을 당하며 아픈 무릎을 끌고 벌목을 저지하기 위해 산자락을 기어다녔다. 또다시 한전이 중장비를 앞장세워 밀고 들어온다면 당신은 이제 죽을 것이라며, 품에 유서를 넣고 다닌다.

  

힘든 계절을 지났다. 지난여름, 폭염 속에서 세 사람이 쓰러졌다. 일흔세 살 엄복이 할머니는 혈압과 당뇨가 있는 몸으로 37도의 폭염이 내리쬐는 산길을 올라 500미터 산정상에서 인부들과 대치하다 쓰러졌다. 예순넷 양윤기 어르신은 산을 오르다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져 바위 위로 굴러떨어졌다. 뾰족한 바위에 등판을 부딪쳤는데, 배낭이 없었더라면 정말 아찔한 상황이 펼쳐질 뻔했다. 쉰일곱 송루시아님은 헬기를 막기 위해 퇴약볕에 헬기 아래에 들어가 계시다가 쓰러졌다.

 








지금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고 있다. 유지되고 있는 농성장만 무려 아홉 곳. 주민들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이 집회 저 행사, 이 손님 저 손님, 이 기자 저 정치인들을 안내하기 위해 하루가 모자라도록 뛰고 또 뛴다.

주민 조직력이 느슨한 곳에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주민들 간의 분쟁이 가시덤불처럼 자라오른다.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많은 이들이 이 싸움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묻는다. 나는 정말 모르겠다고 답한다. 비관적이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잘 모르겠다고 답한다. 다만, 하루하루 주어진 일정들, 주어진 싸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다만, 이 아름다운 산, 거기에 깃든 노년의 평화가 지켜지기를, 배떼기로 기어가는 이 황망한 세상에 진실과 정의가 소박한 나래를 펼 수 있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들은 다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싸울 것이다.

 











* 이 글은 '계간 생협평론 2012년 가을호'에 발표된 글을 일부 개고한 것입니다.

(격)월간잉여 13호에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