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여논단 2014.04.15 05:27

'재능기부'라는 말이 지운 얼굴 (인시)

이따금 말을 감상하곤 한다. 어느 순간 많이 쓰이는 말들이 눈앞에 놓이면, 그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다. 가끔 피곤한 얼굴을 한 말들은 저 이상하지 않아요. 저에 대해 말해주세요, 라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이 말도 피곤해보였다. '재능기부'. 영어도 붙어 있는데, talent donation 이라고 한다. 이 말 참 이상하다. 여기서 이상하다는 건 저 말이 가지는 선의를 비틀겠다는 것이 아니고, 말 속의 피곤함과 허구성아니 호구성에 대한 작은 감상이다.

 



재능 진공 포장 세트

보통 타고나거나 훈련에 의해 획득한 능력을 재능이라고 한다. 재능기부. 말만을 놓고 보면 모차르트 같은 사람이 자신의 재능 일부를 진공 포장이라도 해서 기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불가능하다. 게놈프로젝트를 시작하면 가능할까? 지금 쓰이는 용도는 재능을 써달라는 건데, 그 능력이 아무리 선천적이어도 그것엔 시간과 노력 즉 노동이 들어간다. 때문에 재능기부라는 말은 언뜻 그 모습이 편리하고 쉬워 보이지만, 사람의 시간과 노력을 가정하기에 무거운 말이다.

 

저 말이 어디서 나왔는가. 추적은 어느 말이 그렇듯 어렵다. 한 포털에서 기사들을 살폈다. 재능기부라는 말이 처음 쓰인 건 20009월이다. 연예인들의 봉사 기사에 처음 등장했고, 처음엔 재능과 기부라는 두 단어가 떨어져 쓰이다가 점차 붙여졌다. 그 뒤 생활 기부’, ‘시간 기부라는 말과 함께 쓰이며 여러 기사에 등장했다. 2000년부터 재능기부라는 말이 쓰인 기사를 하나하나 세워보다가 기간검색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2000(2), 2006(6), 2008(97), 2010(1,463), 2012(17,854), 20131~6(14,244). 우연인지 필연인지 저 말의 사용은 지난 정권부터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각 지방자치단체 그리고 심지어 재능이란 것을 사고파는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재능(혹은 노동)의 노골적인 상품화. 이를 보고 스미스가 강조한 효율적인 분업, 아니 그도 예상하지 못한 자본주의의 민낯이라고 해야 할까.

 




재능기부에 내재된 포드와 채플린

20세기 상징적인 인물인 헨리 포드는 언젠가 나는 노동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차를 만드는 노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회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저 말은 시크하다기보다 비인간적으로 들린다. 자동차왕 포드는 화폐를 가지고 나사를 초당 3번 조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노동자 채플린이라는 상품을 사고 이를 통해 잉여가치를 만든다.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는 포드가 가변자본인 노동자를 호구로 볼 때 발생한다. 공장장이 컨베이어벨트의 속력을 높이면 채플린은 더 많은 나사를 조여 포드의 주머니를 채우겠지만, 조인 나사만큼 직업병을 앓다가 해고당해 높은 곳에 올라가 도시민들이 타고 내려온 버스를 기다릴지 모른다.

 

재능기부라는 말에도 포드와 채플린이 있다. 그래서 피곤하다. 여기서 피곤함은 봉사를 하거나 받는 사람들이 아닌, 요구하는 사람들 즉 포드로부터 발생한다. 말의 대중화는 지시 대상을 넓히기 마련이다. 많은 행간에 쓰이면서 의미가 확장되기 보단, 남용된다. 다양한 맥락 속에 쓰이면서 재능기부 해주세요, 란 말은 언젠가부터 동원의 다른 이름으로 들린다. 봉사라는 선의 그리고 자발성을 중심에 둔 의도는 희석된다. ‘봉사가 아닌 것에 저 말을 가져다 놓고, 강요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호구 좋은 명목 속에서 이용하는 사람과 이용되는 사람이 따로 있다.

 





Modern Times , 1936






특히 예술인들에게 재능기부 강요는 가끔 하나의 폭력으로 비친다. 글을 쓰는 것, 촬영을 하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심지어 노래를 만드는 일까지 재능기부라는 타이틀 아래서 이용되고 있다. 누굴 호구로 보나. 언젠가 겨울 차가운 방바닥 종이 한 장 남기고 떠난 그녀가 다시 생경하다. 재능기부는 이렇게 열정페이의 다른 이름이 되고 있는 것일까. 포드는 임금이라도 줬다. 포드보다 더한 사람들이 염연한 노동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에 대한 편리한 말을 찾았다고 보는 건 무리일까.

 





'현대판 장발장'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뮤지컬 <레 미제라블> 자원봉사자 모집 포스터






이름 없는 사람들의 피곤한 얼굴

재능기부라는 말은 재능을 통해 봉사를 한다, 라는 행위를 네 글자로 압축한 것이다. 근데 요 근래 들어 그 행위가 목적이 된 모양이다. '재능기부를 위해' 뭘 한다는 건, 행위를 위해 행위를 한다는 말이 된다. 마치 신성한 일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도시민이 농촌에 가서 벽화를 그리는 건 본래 가지고 있던 재능의 기부가 아니라, 시간과 노력을 들여 농촌사회의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봉사를 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말이 그 말이다, 라고도 하겠지만 후자가 깔끔하지 않아서 좋다. 그리고 그것의 주어는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아니고, 더운 날 밀짚모자를 쓰고 농촌에 내려온 이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재능기부라는 명목 아래서도 많은 사람들이 선의를 가지고, 공동체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언젠가부터 가을이 되면 과학자들이 전국의 도서관에 찾아가 강연을 하고 시골의 아이들과 눈을 마주하는 모습 등을 보면 무릎으로도 박수칠 수 있다.

 

허나 자발적인 맥락이 모호한 호구성 속에서 사람이 아닌 재능이나 능력이 주어가 되는 세상은 우려할만하다. 노래하는 사람보다 노래하는 목소리가 많은 사회는 외롭다. 그 가수가 그리워 책장에서 CD를 찾아 오랜만에 오디오를 틀더라도, 그가 지금 세상에 부재한다면 목소리가 그 그리움을 다 채울 순 없진 않을까. 우리는 유재하의 목소리만을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유재하라는 가수, 그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워한다.

 

선의를 가진 봉사자들의 맥락을 침범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이 그 선의의 맥락을 흐리진 않았을까 염려한다. 그렇지만 오늘도 '무명의 사람들'이 저 명목 속에 동원되고 무뎌지고 있기에 이글을 쓴다. 재능기부라는 말의 피곤함은 그 이름 없는 사람들의 얼굴들이다. 재능기부라는 말의 호구성. 그것은 포드와 채플린, 진공 포장을 할 수 있다는 편리한 환상이 아니었을까.

 








(격)월간잉여 14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