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잉각색 2014.11.20 17:23

잉여소설가로 살았던 2년 (김현경)

소설가로서 나의 첫 데뷔작이 출간된 것이 작년 2012년 5월이다. 출간이 확정되고 편집 작업에 들어간 것이 2012년 1월부터이니 2012년 2월에 창간된 <월간잉여>와 첫 출발의 시점이 거의 비슷한 셈이다. 그리고 (격)월간잉여가 2주년을 맞는 시점과 비슷하게 차기작 출간을 예정하고 있는 지금, ‘잉여 소설가’로서의 지난 2년을 돌아본다.

내게 작가로서의 길은 그저 운명이었다. 거짓말 같지만 어린 시절 또래 친구들과 밖에서 공기놀이, 고무줄놀이 따위를 해본 기억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보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훨씬 즐거웠다. 기억이 있는 한 언제나 내 꿈은 작가였다.

그러나 막상 소설가로서 본격 데뷔를 준비하면서, 구체적으로 신인 장편소설 공모전을 알아보면서 난 내가 추구하는 작품 세계가 내가 속한 현실 세계의 상업적, 대중적 트렌드와는 너무도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자유주의가 초토화시킨 팍팍한 세상 속에서 출판 시장은 극심히 쪼그라들었고 문학 시장은 고사 직전이었으며, 그나마 팔리는 이야기들은 천편일률이었다. 허무주의적 주제를 선정적 소재로 풀어내거나, 감성적 소재를 감각적 표현으로 풀어내거나, 사회비판적 주제를 초현실적 모티브로 풀어내거나. 그 어느 쪽도 내가 갈 수도, 가고 싶지도 않은 방향이었다. 나는 현실적 소재와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이용해 인간 심리와 관계의 구조를 진지하게 풀어내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분량 제한이 가장 문제였다. 한국 대하소설의 끊긴 맥을 잇겠다는 야무진 꿈을 갖고 있던 내게 요즘 주류인, 공모전에서 요구하는 분량인 200~300페이지는 지나치게 짧고 가볍게 보였다. (이게 무슨 장편소설이야?)

결국 공모전 겨냥은 집어치우고 일단 내 멋대로 쓰기로 결심했다. 순수소설가로서의 사명은 상업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있지 않다고 여겼다. 내 자신이 언제 준비될지도 모르는데 현재의 유행에 너무 연연할 필요 없다고도 판단했다. 10년 가까운 세월 수없이 많은 습작을 거치며 데뷔작을 준비하는 동안 잉여로서의 삶을 만끽했다. 친구들은 졸업하고 취업하고 결혼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오로지 쓰고 또 썼다. 내 꿈을 믿고 지지해 준 가족들, 그리고 블로그에 올린 내 습작을 보고 팬이 되어준 이들의 격려로 그 세월을 이겨 냈다.

마침내 세상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만하다 여겨지는 첫 작품을 완성했다. 무려 25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다 세계 최초의 ‘대하연애심리소설’이라는 장르의 작품이었다. 그 작품의 출간을 위해 수없이 많은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면서 난 궁극의 잉여 신세를 경험했다. 장르를 특정할 수 없다. 분량이 적절치 않다. 형식이 애매하다. 내가 들은 대답은 그뿐이었다. 내용에 관한 코멘트는 한 번도 없었다. 작품이 20% 정도 완성되었을 당시 먼저 출간 제의를 해 왔던 출판사에서도 완성작의 분량을 보고는 난색을 표했다. 그럼에도 분량 면에서는 도저히 타협을 할 수 없었다. 연애는 역사다라는 모토 아래 역사학적 방법론, 즉 시간을 축으로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관계와 심리를 분석하고 묘사한 디테일을 제거하고 나면 내 소설은 흔해빠진 로맨스 소설에 불과해지기 때문이었다. 물론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리고 대다수 독자들 입장에서는 흔해빠진 로맨스 소설이 훨씬 더 필요했던 것이리라.


그 과정을 통해 오히려 내 작품이 세상에 나와야 할 이유를 더욱 확신하게 된 나는 최후의 수단으로 ‘1인 출판사 창업’에 관한 강좌를 들었고, 그곳에서 나의 데뷔작을 출간한 출판사의 대표님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만나는 순간 나는 마치 흔히들 결혼 상대를 첫눈에 알아본다는 것처럼 확실한 느낌을 받았는데, 사장님 역시 그랬다고 한다.(오해가 없도록 밝혀 두자면, 사장님도 나도 이성애자 여성이다.) 그렇게 나와 그녀가 한 큐에 통한 코드를 정의하자면, 무엇보다도 삶도 사업도 규격에 맞추려 하지 않는다는 점, 즉 한 마디로 ‘잉여 기질’이라 할 수 있겠다. 당시 사장님도 극심해진 출판계 불황과 양극화 속에서 소규모 출판사를 경영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사업을 막 접으려 하는 찰나였는데, 운명처럼 내 원고를 만나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출판업에 열정을 불태워 보기로 결심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운명처럼 내 데뷔작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비록 제작비를 한 푼이라도 아끼려고 노력한 티를 여러모로 감출 수가 없는 때깔이었지만, 그래도 내 이름 석 자가 어엿하게 박힌 책이 전국 서점에 깔리던 날, 30평생 간직해 온 꿈이 이루어지던 그날의 기분은 나름 소설가로서의 글발로도 여태 마땅히 표현할 바를 찾지 못하겠다.

그러나 진정한 놀라움은 그 직후에 찾아왔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때까지가 ‘잉여(소설가 지망생)’의 삶이었다면 그 이후로는 ‘잉여 소설가’의 삶이 시작되었을 뿐이다. 내 책이 나왔다는 사실을 내 지인들 말고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우리 회사는 매스컴에 광고 따위를 할 여력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언론사에 책과 보도 자료를 뿌려댔지만 아무도 기사를 써주지 않았다. 겨우 무료 일간지에 기사가 한 번 실리고 라디오 방송 2개에 협찬이 나간 것이 전부였다. 난 얼마 되지 않는 내 인세를 홍보비로 쓰자고 내놓았다. 사실 내 책은 분량이 너무 많아서 아무리 아꼈어도 제작비가 남들보다 배 이상 들었기에 그 정도는 마땅한 보답이라 여겼다. 사장님은 매출이 나오면 꼭 갚아 주겠다고 하셨다. 그 돈은 오프라인 서점 매대 광고와 전자책 이벤트 배너 광고 비용으로 쓰였다. 할 짓이 없어 하는 거지 경험상 별 효과는 없을 거라고 했다. 진짜 별 효과가 없었다. 결국 초판도 다 소진하지 못하고 말았다. 말인즉 제작비도 건지지 못했다는 말이다.

작품 자체에 대한 평은 나쁘지 않았다. 온라인 서점이나 블로그에 올라온 몇몇 리뷰들은 과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가 애초에 판매 타깃으로 잡았던 20~30대는 그렇게 긴 분량의 소설에 친숙하지 않다는 것이 주요 패인이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지인들을 통해서도 내 친구들보다 오히려 친구의 시어머니라든가 엄마 친구, 이모 친구 분들께 훨씬 더 적극적인 호평을 받았다. 일하고 애 키우느라 바쁜 내 또래들은 4권씩이나 되는 내 소설을 끝까지 읽어내기조차 어려워했다. 차가운 현실에 직접 맞닥뜨린 나는 대하소설의 맥을 잇겠다는 꿈은 일단 접어두기로 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여러 권짜리 소설을 쓰는 것은 조정래, 하루키, 베르베르나 되지 않고서는 할 짓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내 데뷔작은 ‘망했다.’ 지인들과 특히 사장님이 “요즘 책 내서 망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며 위로해 주었지만, 어쨌거나 보기 좋게 망한 거다. 얼마 안 되는 인세도 모두 홍보비로 썼기 때문에 내가 데뷔작으로 얻은 경제적 수익이라곤 인터넷 유료 연재 사이트 고료와 전자책 판매 수익뿐인데, 매달 교통 통신비 정도나 충당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참고로 난 출퇴근도 연애도 하지 않고, 쓸데없이 돌아다니거나 전화로 수다 떠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교통 통신비가 또래 평균보다 적게 드는 편이다.) 어차피 각오하고 예상했던 결과였다 해도 나를 믿고 투자해 주셨던 사장님께만은 죄송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 다른 책들이 계속 나오면서 회사는 근근히 굴러갔지만, 내 책을 다시 내 달라는 말은 벼룩도 낯짝이 있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전보다 조금도 투명해지지 않은 미래 앞에서 헤매던 중 우연히 ‘월간 잉여’에 대한 기사를 접했다. 당장 구할 수 있는 과월호를 모두 구매해 읽었다. 우리 사장님을 만났을 때 버금가는 반가움에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싶어 마침 모집하고 있던 ‘300잉 클럽’에 이름을 올리고, 날림 투고를 하여 1주년 기념호에 글이 실리는 영광을 얻었다. 비혼주의에 관한 그 글을 보고 무명 소설가인 여자친구와 비혼주의를 견지하며 장기간 연애 중이신 박조건형 님께서 연락을 주셔서 깊은 동지감과 함께 상대적 박탈감도 느낄 수 있는(그러니까 비혼주의자 무명 소설가도 얼마든지 연애 잘할 수 있다구. 상황 핑계 대지 마!) 귀한 인연도 맺게 되었다.

그러다 올 초 뜻밖에 사장님으로부터 차기작을 내자는 제안을 먼저 받았다. 비록 상업적으로는 재미를 못 보았지만, 내 작품을 읽어본 지인들로부터 “이만한 필력을 가진 작가를 이만한 출판사에서 만나기 어려우니 꼭 잡으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무명작가가 출판사를 만나기 어려운 것만큼 무명출판사에서는 작가를 만나기가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차기작 계약서를 쓰면서, 난 다시 또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당장 집필에 들어가 10개월 만에 또 하나의 세계 최초 장르인 ‘실용 심리학 소설’의 원고가 완성되었다.

집필 들어갈 때만 해도 “한 권짜리기만 하면 된다”던 영업부는 “뭐 또 말도 안 되는 장르냐, 분량도 너무 많다”며 난감해 했다.(젠장, 단권 420페이지 분량이 뭐가 많아!) 그래도 어찌어찌 편집 회의를 통과하어 올 연말 내 출간을 목표로 편집, 교정 작업까지 일사천리로 마치고 디자인 작업에 들어갔는데, 웬일인지 며칠 전 출간 일정이 기약 없이 연기되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정확한 이유는 못 들었지만 자금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번에도 책이 나오기만 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달려왔는데, 과연 무사히 나올 수는 있을지, 이번 책도 망하면 내 인생은, 그리고 우리 회사는 어떻게 될지… 2년차 잉여 소설가는 다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차디찬 눈보라 속에 홀로 선 기분으로 하루하루 시간만 죽이고 있던 차에, 바빠서 잠시 잊고 있던 (이제는 ‘격’)월간잉여 2주년 기념호 원고 모집 공고를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간의 모진 세월, (격)월간잉여는 어떻게 살아남아 여기까지 왔을까? 고백하자면 이 잉여 소설가가 굶어죽지 않고 계속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어엿한 직장인인 여동생에게 몇 년째 얹혀살며 살림이나 해주고 있는 덕이다. 이것만도 과분한 행운인 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이 행운을 사소한 욕심이나 타협으로 탕진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이 더해진다. 그러나 이 짓도 나이 꽉 찬 여동생이 시집을 가면 곤란하게 되겠지. 되도록 늦게 갔으면 좋겠는데, 내가 봐도 괜찮은 남자친구랑 안정적인 연애에 접어든지 지금 6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이런… 이 멀쩡한 청춘들 발목 안 잡으려면 내가 하루빨리 자리를 잡아야 할 텐데.

그런 막막함과 회의가 내 앞을 가로막을 때마다 난 데뷔작 출간 준비를 하면서 보도 자료로 써 놨던 인터뷰를 다시 읽으며 초심을 되새기곤 한다.

“어차피 제가 앞으로 쓰고 싶은 작품도 규격에 맞춘 작품, 트렌디한 작품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현실에 타협해 봤자 앞길이 더 쉬워질 것 같지는 않아서, 잘 되든 안 되든 차라리 처음부터 제 스타일로 밀어붙이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어요. 블로그에서 연재했을 적에 이런 소설을 기다려 온 독자층이 소수라도 분명히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출간해야겠다는 의지가 있었어요. 어차피 소설을 돈 벌고 출세하려고 쓰는 건 아니잖아요. 비록 분량과 형식은 상품으로서 적당하지 않지만, 작품 자체의 진실성과 독창성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래, 적어도 나로선 이 길 위에서 다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음이 자명하다. 나란 인간에게 글을 쓰는 일은 그 자체가 삶이고, 단 한 번의 삶을 의미 없이 살 수는 없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잉여 소설가의 길은 각오 이상으로 험난하고 혹독하고 고독하다. 지금까지는 잘 버텨왔는데, 앞으로는? 어디로, 언제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 그리고 월간잉여와 다른 자발적 잉여 동지들은?


(편집자 주) 이 글을 쓰고 몇 달 뒤 김현경씨의 소설이 출판됐고, 2쇄까지 찍게 됐으며, 월간잉여에 광고도 실으셨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김현경. 세계 최초 ‘대하연애심리소설’의 창시자이자 비혼주의자.
역사학도이자 20년 경력의 사회지도층 빠순이. 기독교인이자 무정부주의자.
이런 복잡다단한 정체성 탓에 대학 졸업 후 쭉 자발적 잉여 라이프를 영위하고 있으며,
죽을 때까지 이렇게 사는 게 목표인 행복한 여성.
블로그 http://hanggang07.blog.me 페이스북 /hanggang.kim





(격)월간잉여 15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