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2014.11.27 15:18

연서복 특집: 너는 진심, 나는 빡침 (문라니)

"오늘 술 좀 사주세요" 후배 A가 찾아와 슬프게 말했다. "남자친구랑 헤어졌니?" A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좀 갖재요. 제가 질렸나봐요. 근데 저는 걔를 평생, 아무도 안 만나고 기다릴거거든요. 저는 걔 진짜~ 사랑하거든요. 그렇게 사랑한 사람 처음이거든요." . "혹시 남친한테 평생 기다린다, 뭐 그런 말 했어?" "아뇨, 아직요. 왜요?" 나는 힘주어 말했다. "그런 말 절대 하지마ㅠㅠ"

 

나는 '진심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덜컥 겁부터 난다. 인간관계에서 많은 경우, '진심' 어쩌구 하는 것은 난감한 생일선물 같은 것이다. 뜯어보니 아무 쓸모도 없고 내 취향도 전혀 아닌데 예의 상 고맙다고 해야 하는. 왜냐하면 진심 운운하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진심이기 때문에 그 진심이 받아들여져야만 한다고 '진심으로'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숙한 사람은 선물을 줄 때 그 사람이 좋아하면 좋겠지만, 만약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교환을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선물을 고르고 주는 것까지는 나의 몫이고 그 선물을 좋아하는 것은 받는 사람의 몫임을 알기 때문에. 하지만 이 진심주의자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

 

요즘 ~이런 웃기지도 않는 멘트를 치는 연서복(연애에 서툰 복학생)이 유행이다. 나는 처음 연서복 트위터의 멘트를 보고 웃었다가, 곧 웃을 수만은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나는 연서복을 이미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혼자 연애하자고 밀어붙이고, 그걸 거절하면 계속 나만 사랑할 거야 운운하다가 끝내 받아주지 않으면 내가 나쁜 년이라고 소문내고 다니는 부류를 연서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대학 때 세 번의 연서복을 경험했는데, 이로 인한 트라우마로 한동안 나는 남자 사람 친구를 만들지 못했다. 내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는 남자 뿐 아니라 한두 번 먼저 전화나 문자로 연락해오거나 밥을 먹자고 하는 남자에게조차 연락을 씹어버렸다. 연서복 1은 내가 이럴 거면 왜 자기를 받아줬냐(문자 받아준 게 그렇게 큰 죄인가여?)’고 말했고 연서복 2는 '왜 여지를 줬냐(니가 외국 가있어서 심심하다고 엽서 보낸다는 걸 주소 불러주기만 했는데. 심지어 난 답장도 한 번 안했는데여?)'고 했다. 연서복 3'니가 먼저 꼬리쳤다(저 원래 잘 웃는 편이거든여)'며 나를 희대의 썅년으로 만들었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나는 그 비난을 사실로 믿어버렸던 것이다.

 

근거 없는 타인의 비난도 반복되면 진짜로 믿게 되듯이 연서복은 자신의 진심에 취한다. 오지은의 노래 가사를 빌면 날 사랑하는 게 아니고 / 날 사랑하고 있단 / 너의 마음을 사랑하고 있는 게 아닌지 / 날 바라보는 게 아니고 / 날 바라보고 있단 / 너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라고 묻고 싶은 상태가 되는 것 같다. 자신의 진심을 한 겹 한 겹 아주 정성스럽게 싸다 보니 정작 그 안에 뭘 넣었는지는 잊어버린다.

 

마지막으로 만난(제발 내 인생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 연서복 3은 앞서 겪은 연서복 12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방학 때 네이트온으로 채팅을 하다가 갑자기 "사실 나 너 좋아한다"고 썼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게 학교 동기일 뿐, 한 번도 남자로 보인 적 없었다. 최대한 돌려 말하느라 "당황스럽네. 미안하지만 당분간은 누굴 만날 생각이 없어"라고 했더니 그가 쓴 말이 아직도 생각난다. "나 지금 안습(‘안구에 습기찬다는 그 당시 유행어)이라 모니터가 안 보인다. 다음에 다시 얘기하자." . 정말 당황스러웠다. 개강 후 학교에서 만난 동기들과 선배들이 연서복 3이 내 이야기를 하고 다니는 걸 전해주었다. 그가 전파하고 다닌 진리에 따르면 나는 먼저 그에게 꼬리를 쳤고, 사람 마음을 가지고 장난 쳤으며, 그는 나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해 10kg나 빠졌다. ? 그는 나를 불러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했다. ? 내 입장을 설명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해시키길 포기하고 피해 다녔다. 그러자 그는 친구들에게 내가 자기를 이용했다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호주로 외국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는데 안부 인사를 하며 농담으로 "캥거루랑 코알라 가져와" 했더니 캥거루 인형을 사 온 적 있다. 그 캥거루 인형을 받은 것으로 나는 그 아이에게 아주 비싼 선물을 요구해 받은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더 시간이 지나자 그는 여전히 나와 친하게 다니던 여자들을 한 데 묶어 싸잡아 이상한 여자애들이라고 말하고 다니기 시작했다.

 



캥거루한테 맞아볼래? ㅠㅠ




그는 스스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혼자 감성돔이 되어서 슬픔의 강을 유영하고 있었다. 1년 정도가 지나서,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여전히 나를 미워하면서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나는 상처 받았지만 그 일을 어느 정도는 잊고 또 객관적으로 바라보게도 됐는데,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는 나를 미워하는데 에너지를 다 쓰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서 그때까지도 새로운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서복 트위터의 말들을 보면 내가 겪었던 진심투성이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의 진심운 조른다고해서 생겨나는 게 아니란 걸 그때 나를 미워하던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우리는 자신의 진심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진심도 소중하다는 것을 가끔 잊어버리는 것 같다. 연서복이 극단적인 형태로 발전하면 사랑한다고 말하며 주거침입을 하는 사생팬이 되는 것 같이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 진심은 폭력일 뿐이다. 이런 타인에 대한 몰이해와 과도한 기대, 그리고 높은 의존은 자기연민과 낮은 자존감의 밭에서 자주 자라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니까 연서복은 남을 사랑하기 전에 우선 자기부터 사랑하도록 하는 걸로 합시다, 라고 하면 재섭나여? 하지만 진심입니다(진지).

 

 

문라니 http://ingchu.com

가지가지 하는 것이 취미입니다. 가지 농사를 시작했습니다.







(격)월간잉여 1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