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012.04.25 21:41

북한 출신 잉여:이한영 편(글 쿠마)

잉여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숨기기는 경향 때문이다. 그들이 자신을 숨기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내세울만한 이야깃거리가 없는 것도 그 중 하나다. 그렇기 때문에 ‘월간잉여’가 잉여들의 이야깃거리를 세상에 내놓는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 희소성에 매료된 것이다.
그런데 한 탈북자는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4년 동안이나 잉여로 살았다. 그는 한국 정부의 비밀 유지 종용과 북한의 암살 위협이 만들어낸 ‘남북공동제작잉여’이었던 셈이다.





23년 간 공산주의 체제 하에서의 호화로운 생활
책 <김정일 로열패밀리>의 저자 이한영(본명 리일남)은 1960년 4월,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어머니의 동생, 즉 이모가 김정일의 부인이었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자랐다. 경호원이 딸린 집에서 특별 보호를 받았고, 1945년에 김일성의 지시로 세운 만경대혁명학원에 입학했다. 원래 이 학교는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희생된 대원이나 애국자 자녀들을 위한 학교다. 당을 위한 헌신을 으뜸으로 평가하는 북한 사회에서 이 학교에 입학하는 것은 그 자체가 명예였다. 김일성도 이 학교를 자주 찾아 학생들을 격려하곤 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한영이 만경대혁명학원에 들어간 것만으로도 엄청난 특혜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직 생활이 싫증난 그는 유학을 결심한다. 76년부터 모스크바로 유학을 떠났는데, 74년부터 모스크바를 왕래하며 정신질환 치료를 받던 이모가 그를 도왔다. 이 곳에서도 호화로운 생활을 계속했다. 한 달에 5백 루블을 받았다. 당시 북한 대사 월급이 4백 50루블이었으니 얼마나 큰 돈인지 알만하다. 게다가 루블로는 살 수 있는 물건이 제한되어 있다는 이유로 매 달 1천 달러의 용돈을 추가로 받았다.
벤츠를 몰고 다녔고, 클럽에도 자주 다녔다. 그렇게 모스크바 생활에 푹 젖어있던 그는, 81년에 김정일의 지시로 평양으로 돌아간다.

망명
그의 망명은 우연한 계기에서 비롯됐다. 82년에 스위스 제네바에 갔다가 한국 대사관에 전화를 걸었다. 미국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일반 북한 사람이었다면 감히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그러나 이한영에게는 별로 거리낌 없는 행동이었다. 어릴 적부터 한국과 미국에 대한 정보를 많이 접했고, 러시아 유학생활을 통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을 만나면서 외국에 대한 거부감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 스물 세 살의 어린 나이였던 그는, 자신의 인생이 이 전화 한 통으로 완전히 변할지 짐작조차 못했다.
한국 대사관 사람들을 만나, 처음에는 미국에 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대사관 직원들은 한국행을 권했다. 먼저 한국에 가면, 이후에 얼마든지 미국에 갈 수 있다고 설득했다. 결국 한국행을 결심한 그는 프랑스, 벨기에, 서독, 필리핀을 거쳐 한국으로 망명한다. 82년 10월 1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낚인 것이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취조와 고문을 받았고, 자신과 주변인의 삶에 대해 23년 간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모든 것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렇게 두 달 간 모든 것을 쏟아낸 뒤, 1년 간 한국 사회 적응 교육을 받고, 84년 3월에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은둔 생활을 시작한다. 한국 정부가 그의 은둔을 종용했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 미국에 가고 싶어했지만, 한국 정부는 도주 위험 등을 이유로 그의 출국을 거부했다.


이한영이 고발한 김정일 등 북한 최고위층의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의 굶주린 주민들과 너무 나도 다르다.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은 어릴 때부터 해마다 1백만 달러어치의 생일 선물을 받았다. 다이아몬드가 박힌 시계, 금을 입힌 권총 등이었다. 김정일 관저에는 캐딜락, 롤스로이스, 벤츠 등 외국 고급차가 즐비했고, 김정일 일가만을 위한 생수를 생산하는 공장까지 있었다. 이 밖에도 왕조 국가의 왕보다 훨씬 더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김정일 등 최고위층의 모습이 이한영의 책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만일 이 책이 북한에서 출판되었다면, 북한 주민들이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꼈을 지 궁금하다.


피습
<김정일 로열패밀리>는 1996년 6월,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이라는 제목의 수기로 먼저 소개됐다. 그로부터 채 1년도 지나지 않은 1997년 2월 15일, 경기도 분당의 한 아파트 엘리베이터 앞에서 한 남자가 총에 맞아 숨졌다. 바로 이한영이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범인은 잡히지 않았지만, 북한이 보낸 간첩으로 추측된다. 이한영 씨가 죽기 전까지 그들이 간첩이라 말했고, 살해현장에서 발견된 권총탄피가 북한 간첩들이 많이 사용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남겨진 가족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소원이 하나 있다. 이한영 씨 묘를 국립현충원으로 이장하는 것이다. 2010년에 사망한 황장엽 씨 묘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면서 이러한 바람은 더욱 커졌다. 황장엽 씨는 주체사상 이론가이자 노동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낸 북한 최고위층 인사로, 97년에 망명해 죽는 날까지 북한의 체제와 권력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가 국제 사회에 알린 북한 고위층의 실상은 거부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이 공로를 인정 받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다. 이한영 씨 가족도 그가 세상에 알린 북한 최고위층 정보에 대한 공로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다. 죽어서도 잉여여야 하냐는 것이다.

2013년 봄

우리 나라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이 경과된 외교문서를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30년이 경과한 다음 해 3월에 공개하므로, 2013년 3월에는 1982년 외교문서를 공개할 것이다. 이한영 씨는 1982년 10월 1일에 서울 땅을 밟았다. 따라서 그가 한국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가 내년에 공개될 것으로 보인다. 뿐만 아니라, 당시 북한은 갑자기 사라진 이한영을 찾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고, 한국 정부는 이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기록이 공개된다면, 북한에서 태어나 미국에 가고 싶었으나 한국에 정착하고 만,‘잉여인간’ 이한영에 대한 재평가가 가능해질 것이다. 




※ 월간잉여 4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