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스포츠 2012.12.03 22:11

[피로사회]읽은 척 하기(글 진공)

[피로사회]는 철학책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팔렸다. 이것이 어떤 의미냐. 어디 가서 이 책을 읽었다고 잰 체하는 놈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는 소리다. 종합 시사 문화 교양지를 표방하는 월간잉여다. [피로사회]를 못 읽은 월잉 독자님들이 어디 가서 기 안 죽고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역시 월잉이 해야 할 몫이다. 마침 8월호 주제도 '휴식', [피로사회]와 맞닿아 있다. -잉집장 주-





책 [피로사회](2012)



바야흐로 '무한긍정'의 시대가 왔다. "Yes, We Can"이라는 이중긍정의 슬로건,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베스트셀러들, 그리고 긍정 전도사가 될 것을 강조하는 TV 방송과 기업들. 날이 갈수록 부정성은 거세되고 세상은 무한한 긍정성으로 넘쳐나고 있다. 요즘 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을 롤모델 삼아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스스로 끊임없이 자기 계발에 매진하고, 때로는 좌절하다가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을 빌려 다시 일어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하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은 정녕 우리 스스로의 주체적인 결단에 의한 것일까?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있는 '부정성'의 힘이 없다면,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긍정하는 힘만 있다면 우리는 외부에서 밀려드는 온갖 자극과 충동에 무기력하게 내맡겨진 존재가 될 것이고, 그것에서는 어떠한 주체적 정신성도 생겨날 수 없다.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의 침팬지 시저는 자신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부정을 "No"라는 말로 선언했다. 그리고 이는 '그'가 부정을 통해 이 땅위에 온전한 하나의 주체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어쩌면 헤겔의 말대로 인간 존재를 생동하는 상태로 지탱해주는 것은 '부정성'일지 모른다. 바로 니체가 말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힘 말이다.




영화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2011)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이러한 철학적 사유를 바탕으로 지금의 시대를 "성과사회"라는 개념으로 규정한다. 성과사회는 "~해서는 안된다", "~해야만 한다"는 명제가 지배하는 규율사회와 대비하여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의 사회이다.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체한다. 모든 사람이 성과주체이며 자기 자신의 경영자가 된 사회. 그리하여 모두가 스스로에 대한 착취자이자 피착취자가 되어버린 사회. 모두가 자신이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모두가 강제하는 자유 혹은 자유로운 강제에 자기 자신을 맡긴 사회가 바로 지금의 "성과사회"이며, 현 시대의 대표적 질병인 우울증의 배후에 바로 이 성과사회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성과사회가 도래한 원인을 자본주의 시스템의 발전에서 찾는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끊임없이 더 높은 생산성과 이윤을 추구한다. 이전의 규율사회의 효율성은 한계에 이르렀고, 더 높은 생산성을 위해 착취의 매커니즘이 '타자의 강제'에 의한 착취에서 '자기 스스로에 대한 착취'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매개로 하여 능동성과 자율성을 성과주체 스스로가 추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전의 사회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며 높은 생산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설명은 현재의 신자유주의 시스템을 이해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매번 더 높은 생산성과 효율적 지배를 위해 모습을 바꿔왔지만, 결국엔 매번 전 세계적인 격렬한 저항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위기는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동시에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를 더욱 교묘하게 은폐하도록 시스템을 진화시킨다.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와 고용불안, 하락하는 실질임금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다'며 받아들이는 체념은 곧 스스로 부정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이러한 긍정성의 무한 확장이 이 시스템을 유지시키는 열쇠인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성과사회로의 변화의 원인으로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의 변화를 지적하지만,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는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또한 모든 성과주체들을 외적인 지배에서 완전히 자유로우며, 자기 자신 외에는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존재로 규정한다. 아마도 저자는 외적인 지배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다는, 지배체제에 대한 저항보다 우선하여 스스로 착취자이자 피착취자가 되어버린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과 자각이 선행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 듯하다.

이에 따라 저자는 성과사회에 대한 진단의 처방으로 '깊은 심심함'과 '분노'를 제시하지만, 그 중에서도 '깊은 심심함'을 좀 더 비중 있게 서술 한다. 저자에 따르면 깊은 심심함이란 곧 사색이며, 사색적 삶이란 '자극에 대해 즉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극에 대한 반응을 늦추고, 스스로 생각하고,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깊은 심심함을 통해 다시금 부정성을 회복하게 된다면, 우리는 잃어버린 '분노'를 되찾을 수 있다. 분노는 수동적인 짜증과 달리 현재의 모든 것에 대해 총체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며, 현재의 상황을 중단시키고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도록 만드는 능력이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프로이트나 푸코 등의 면역학적 이론이 권위를 얻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이미 면역학적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증명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유럽에서 '피로사회'나 혹은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와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상은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담론들이 등장하고, 대중들의 주목을 받으며 베스트셀러가 된다는 사실 자체가 어쩌면 현재의 '성과사회'가 점차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알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여전히 현대 사회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짤막한 휴식은 자신을 더 소진하기 위한 통제된 휴식에 불과하고, 인터넷과 SNS 등의 보급으로 인해 그 휴식 시간마저도 과잉정보와 외부자극에 끊임없이 자신을 노출시키는 세태를 고려하면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함을 떨치기가 어렵다.


그래서 난 깊은 심심함 이전에 '잉여 되기'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메일을 저자 한병철에게 쓰려고 한다...는 건 훼이크지만, 어쨌든 성과사회에서 우리 잉여들은 상대적[각주:1]으로 깊은 심심함, 즉 사색에 누구보다도 유리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너무나 잉여로운 나머지 숨참기 놀이마저 개발하고 소개하는 월잉의 필자 so_insane씨가 바로 이 시대를 바꿔낼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비록 통장 잔고의 여유는 부족할지라도, 충분히 사유하고 사색할 수 있는 여유는 잉여들의 특권이 분명하다. 그래서 본인, 성과사회에 대한 처방으로 당당히 잉여되기를 주장하는 바이다. 이 사회에 잉여들이 더욱 늘어나는 것이 지금의 성과사회를 벗어날 수 있는 지름길인 것이다. 잉여들은 대체로 가난(!)하기 때문에, 잉여들이 더욱 늘어난다는 것은 자본의 확대재생산에도 위기를 더 빠르게 가져오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잉여의 확대재생산은 월간잉여의 재정과 발행부수를 늘릴 것이고, 월간잉여의 확산은 다시 사유하는 잉여들을 늘려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까 다들  '300잉 클럽'에 가입해서... 아, 이건 아닌가?









※ 월간잉여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 상대적'이란 말을 덧붙인 이유는 대부분의 잉여들 역시 예비 노동자로서 성과사회, 그리고 TV나 인터넷과 같은 과잉자극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과잉자극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잉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 함정...) [본문으로]